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녜스 바르다 (문단 편집) == 경력 == [[브뤼셀]]에서 엔지니어 아버지와 주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. 원래 이름은 아를렛이였으나 19살에 개명해서 지금 이름으로 바뀌었다고. 부계 혈통은 아나톨리아 출신 [[그리스인]]이라고 한다.[* 아녜스의 삼촌은 유명한 화가였던 장 바르다였고, 아녜스가 다큐멘터리를 찍기도 했다.] 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[[소르본 대학]]에서 문학과 심리학을 전공했다. 사실 영화광들로 유명했던 다른 누벨바그 감독들과 달리 처음엔 영화랑 별 인연이 없었다고 한다.[* 그나마 [[에릭 로메르]]가 비슷하게 영화랑 연관이 없었다.] 문학이나 미술을 좋아했지만 처음엔 [[큐레이터]]가 될 생각이었다고 한다. 이후 에콜 드 보자르에서 사진을 공부하긴 했지만 그때도 영화 감독이 될줄은 몰랐다고 한다.[* 관련된 일화가 있는데, 데뷔작 편집을 맡았던 [[알랭 레네]]는 영화를 보고 [[루키노 비스콘티]]의 흔들리는 대지하고 닮았다고 말한 바 있다. 이에 대한 바르다의 대답은 '''비스콘티가 누구임?'''였고 레네가 당황했다고. 바르다는 데뷔작의 혁신성을 영화광적 지식과 상관없이 그냥 스스로 발명해버린 셈이다. (본인은 [[윌리엄 포크너]]를 예로 들었다.) 바르다 본인도 레네 때문에 영화에 대한 지식을 배웠다고 밝힌바 있다. 참고로 25살에 본 영화가 딱 10편 정도였는데, 그 중엔 [[오슨 웰스]]의 [[시민 케인]]도 있었다고 한다.] 1955년 데뷔작 라 푸앵 쿠르트로의 여행도 영화로 찍을 생각은 없었고, 라 푸앵 쿠르트 사진을 찍어서 친구에게 전할 생각이었다. 그러다가 즉흥적으로 영화 카메라를 빌려 다큐멘터리와 전문 배우를 캐스팅해 픽션을 엮어서 영화를 만들었다. 14,000달러 저예산으로 빠르게 찍었던 라 푸앵 쿠르트로의 여행은 카예 뒤 시네마 세대보다도 5년 일찍 새로운 영화를 발명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바르다를 주목받는 감독으로 만들었다. 편집 과정에서 알랭 레네나 알랭 로브그리예 같은 좌안파 멤버들을 만나 친해지고, 훗날 남편이 되는 [[자크 드미]][* [[쉘부르의 우산]]으로 유명하다.]을 비롯해 ~~애증의~~ [[장뤽 고다르]][* 마지막 누벨바그 생존자라는 공감대가 있고 초기엔 바르다 영화를 칭찬하기도 했으나, 고다르 성격이 워낙 오만하고 까칠한지라 불화가 있다. 평소에도 별로 만나지 않는 듯 하며 2017년 [[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]]에서 혹시나 하고 스위스에 사는 고다르를 찾아갔다가 문전박대 당하고 디스하는 장면이 있을 정도], [[프랑수아 트뤼포]], [[에릭 로메르]] 같은 [[누벨바그]] 멤버들도 알게 된다. 그렇게 두번째 영화 [[5시부터 7시까지의 클레오]]와 [[행복]]을 통해 아녜스는 페미니즘적 주제와 사회비판, 다큐멘터리와 극영화 간의 경계 허물기 같은 진보적인 실험을 내세워 평단의 지지를 받았고 후배 [[샹탈 아케르만]]과 더불어 현대 여성 영화 감독의 선구주자가 된다. 이후 '노래하는 여자, 노래하지 않는 여자', [[제인 버킨]]과 [[샬롯 갱스부르]] 모녀가 바르다의 아들인 마티유 드미가 출연한 [[아무도 모르게]]라던가 [* 비화로, 버킨이 아이디어를 제안하고 각본을 쓴 영화였는데 버킨이 딸 샤를로트 갱스부르를 출연시키자 아녜스 역시 아들 마티유 드미를 데려와 주연을 시켰다고 한다. 원래 호텔에서 베드신이 있었다고 하는데, 친구와 자기 아들의 러브신 장면을 찍는게 영 거시기했는지 아녜스가 잘라버렸다. 이에 버킨이 항의하자 "마티유랑은 절대 안 돼, 할 거면 감독 직접 해"라고 대응했다고.] [[상드린 보네르]]가 주연해 히트쳤던 [[방랑자]] 같은 영화를 발표하면서 활동했다. 자크 드미가 세상을 떠난 1990년대부터 천일야화를 마지막으로 극영화는 손을 뗐지만 되려 2000년대에는 이삭줍는 사람과 나를 통해 다큐멘터리로 활동 무대를 전환하면서 [[DV]]/디지털 영화의 새로운 경지를 열였다는 평단의 찬사를 받았다. 나이가 나이인지라 이전보다 느긋하게 활동하고 있지만, 여전히 정정한 모습을 보이면서 2017년 공동 감독 [[JR]]과 함께 신작 [[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]]을 내놓았다. 영화 주제로 보자면, 여성의 위치에서 페미니즘적인 고찰과 비판[* 다만 바르다는 [[페미니스트]] 사이에서도 상당히 논쟁적인 감독이였다. 극영화 시절엔 아이러니와 은유, 모순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전형적인 여성상을 인식하고 비판하는 페미니즘에 가까웠기 때문이다. 특히 언제든지 대체될수 있는 가부장 체제의 여성의 위치를 아이러니로 비판한 [[행복]]은 공개 당시 [[마지막에 패배한 주인공]] 결말로 불편한 반응과 동시에 가부장제의 불륜을 옹호하는거 아닌가라는 논란이 있었다.]과 극영화와 다큐멘터리 간의 모호한 경계, 마르크스적 고찰, 이면화 작업을 특징으로 꼽는다. 이외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는데 적극적이어서, 2000년대 이후로 디지털 매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[[페드로 코스타]] 같은 혁신적인 디지털 다큐멘터리 흐름에 동참하기도 했다. 여성 영화인들에게 매우 존경받는 감독인데, 바르다 데뷔 이전까지 여성 영화 감독은 알리스 기블라셰 [* 영화 태동기에 데뷔하여, 극영화를 만들면서 여성 영화인의 시초로 꼽힌다. 정작 본인은 2000년대에야 본격적으로 재발굴된 불운의 감독이기도 하다.], 도로시 아즈너나 아이다 루피노, 자클린 오드리 같은 케이스를 제외하면 감독 되기도 힘들었고 잘 눈에 띄지 않았다. 바르다는 그 점에서 여성 감독의 선구자적인 가능성을 선보였고, 현역으로 오랫동안 활동을 이어갔기에 존경받는다. 더불어 자크 드미와 함께 [[누벨바그]] 세대 감독 중에서는 유일하게 할리우드에 정착해 활동한 적이 있는 감독인지라[* 의외로 누벨바그 감독들은 전성기에도 프랑스에 남아서 활동했다. 영어 영화 역시 고국이나 영국에서 주로 찍었다. 가장 할리우드 친화적이었던 트뤼포조차도 [[화씨 451]]에서 영어 영화 만들기의 곤란함을 겪고 줄곧 프랑스 영화만 찍었다.], [[할리우드]]에서도 인지도가 높은 감독이다. 자식으로는 감독이자 배우로 활동하는 아들 마티유 드미와 프로듀서인 딸 로잘리 드미가 있다. 자식사랑이 지극한지 '''자식들의 모습을 기록하고 싶어서 영화에 출연시켰다'''라고 밝히기도 했다. 본인도 유명한데다 남편 자크 드미 역시 프랑스에서 흥행 감독으로 입지가 있어서 젊은 시절 사진들을 보면 [[카트린 드뇌브]]나 [[제인 버킨]]을 비롯한 쟁쟁한 스타들과 같이 찍은 사진들이 자주 나온다. 의외로 고급 에로 영화로 유명했던 잘만 킹 부부하고 친했다고 한다. 때문에 장례식 전 추모 행사에도 드뇌브를 비롯해 [[마리옹 코티야르]]와 [[기욤 카네]], [[상드린 보네르]], [[자크 오디아르]], [[제인 버킨]] 같은 명사들이 얼굴을 보였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